모든 말들은 의도가 탑재된 채 끝없이 흐르고 흐른다
의도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 메시지는 때를 맞춰 당도 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때에 맞추어 도착하지 않거나 원하는 메시지를 받지 못할 때 조급함은 종종 화로 이어 지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는 이미 특정 룰과 패턴이 있어 그보다 빠르거나 늦어질 때 기다림이 요구되기도 한다. 다 알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참으로 어렵다.
인생이 고달픈 이유는 이 말들이 실어 나르는 메시지와 속도가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말 속에 흐르는 메시지는 논점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가슴에 깊은 공감을 형성해야 충분히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느끼게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깊은 대화는 “바로 그때” 내 삶에 중대한 메시지로 다가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그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고, 그 안에서 내게 주어진 메시지를 포착해야 한다.
모든 건 순간적으로 일어나므로 나의 센스는 24시간 완전히 가동되어야 잡힌다. 이런 메시지 포착 능력이 서로 반짝이고 있을 때 교신은 원만 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를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들의 관계란 것이 사회적 가면을 쓴 채 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스스로가 메신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말들만 내뱉는 게 현실이다.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른 채 말이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이런 방식으로 펼쳐지는데 사람들과의 대화 역시 점점 일방적인 형태로 흘러가면서 결국에는 서로 기피하게 되어버린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 논하게 되거나 혹은 그마저도 관심을 두지 않는 형태가 되어버려 홀로 우주의 부랑자처럼 떠돌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외로움을 목격한다.
대화 나눌 사람도 전달 받을 메시지도 없이 떠돌며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무언가를 발견하곤 한다. 잊고 있던 기억 속에 조용히 기다리던 나의 메시지는 난파된 조각들 속에서 그렇게 건져 올려진다.
지금은 입을 수 없게 된 아주 오래된 좋은 옷을 손에 쥔 사람처럼 이미 때가 지난 그 메시지에 다시 마음이 깊게 패인다.
그리고 다짐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러면서 더 두터운 외로움을 껴입기로 한다. 모든 관계에 대해 철벽을 세우며 더 견고히 자신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사회적 가면은 서로를 깊은 불신과 외로움으로 몰아세워서 닿아져야만 얻을 수 있는 메시지를 원천 봉쇄했다. 내가 나로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철저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 화려한 언변으로 방어 기제를 끝없이 펼쳐야 가능한 것일까?
누군가의 대화가 늘 즐겁지 않고 종종 분노로 종결되어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끊임없는 내적 희망을 품게 되는 건 여전히 관계의 역할 구도에서 전달될 메시지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 때문일 것이다.
한 번쯤 가면을 벗어 보는 건 어떨까? 가면 대신 순수하게 관계에 집중해 보는 것을 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가면을 벗어야 한다. 어차피 남의 가면은 내가 벗길 수 없으므로 나의 무장 해제를 선보이면 악인이 아니고서야 상대방 또한 스스로 가면을 내리지 않을까?
물론 악인을 마주칠 때도 있으니 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마음의 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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