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웰빙(Well being)이 유행이었다.
일에 매몰된 직장인들에게 개인적인 여유로운 생활도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맥락이었다. 직장생활은 단지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생을 완성하는 과정이어야 정상이므로 웰빙이 유행인 현상은 비정상적인 사회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웰빙이라는 말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대체되어 서서히 사라진 것은 바람직하다.
웰빙에 이어 웰다잉(Well-dying)이 유행이었다.
웰다잉을 임종(臨終)의 상황으로 좁게 보면 “존엄사”나 “안락사”를 의미하지만, 대체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웰다잉은 노인층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므로 사회 전반적인 이슈가 되기 어렵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웰다잉도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도록 암이나 치매 없이 적어도 화장실이나 식사는 스스로 챙길 수 있는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면 좋겠다”는 수준으로 피상적이다. 요즘은 병원의 영리 목적 연명치료나 요양원의 非인간적인 환경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런 것들도 실버 산업이 커지면서 요양원 서비스의 프랜차이즈化 등으로 자연스럽게 표준화되면 많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웰빙 이슈가 사라진 것이 직장인들의 삶이 나아진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웰다잉 이슈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것이 좋은 사회가 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까?
사실 노인의 일상이 웰빙이면 굳이 웰다잉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웰다잉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슈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표출되는 노인의 죽음과 관련한 불행과 여러 갈등 현상을 보면 우리 사회에는 노인이 웰빙할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노인이 웰다잉할 수 있는 웰빙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필요하다.
웰다잉은 자연사(自然死, 노쇠하여 자연히 죽음)와 연결된다. 자연사는 아무런 준비 없이 기다리면 주어지는 것일까? 주위의 죽음을 보면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잘 죽는 것도 복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잘 죽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면서도 웰빙과 웰다잉을 진지하게 준비하는 노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웰빙과 웰다잉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좋은 삶이란 개별적이어서 스스로 이번 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 이외에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참고할 만한 사고의 틀로써 “욕구 이론”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메슬로우가 주장한 “욕구 5단계 이론”이다.
생리적 욕구는 의식주와 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면 웰빙이나 소확행 할 수 있는 삶을 원하게 된다. 웰빙이 해결되면 조직이나 집단에서 동료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게 되고, 소속감 욕구가 총족되면 이어서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마지막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다.
후진국에서는 대체로 두 번째 수준인 안전 욕구의 충족에 집중할 것이다. 개발도상국을 넘어 선진국이 되면 사회적 욕구까지 충족될 것이므로 존경의 욕구나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라는 단어를 일상의 대화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복 받은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논의되는 웰다잉을 가만히 지켜보면 대체로 애정, 친화, 소속감 등 “사회적 욕구” 수준에서 얘기되는 것 같다. 이런 수준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시대 상황을 보면 이제 우리는 “존경받는 노인”의 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나아가 “자아실현의 욕구”를 목표로 살아야 마땅하다. 이런 맥락에서 웰다잉을 얘기하고 논의해야 한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경 받기를 원한다. 그것도 간절히.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돌이켜보면 수십 년의 생애가 대하드라마보다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 인생이 무시당하면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대하드라마와 같은 삶을 알면서도 정작 존경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냉정히 말하면, 과거의 힘든 삶은 이타적 대의명분 때문에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살아졌던 것이 아닐까?. 가족과 집안과 조직을 위한 희생을 폄훼하는 것은 맞다. 남들이 볼 때 “그렇게 살아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회복지 봉사활동을 하는 선배의 얘기다. 불행한 독거노인을 보면 대체로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 자식 잘되면 된다”라면서 자식 걱정하는 유형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원망하는 유형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삶의 과정은 자신만의 소중한 체험이다. 인연과 습(習)에 따라 스스로 설계한 대로 체험한 것이므로 어떤 삶이든 삶 자체는 젼혀 문제가 없다. 마치 직업에 귀천이 없는 것처럼 삶 또한 귀천이 없다. 다만, 문제는 본인의 소중한 체험에 대해 마지막까지도 성찰과 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그것이 문제가 된다.
아무튼 독거노인의 안타까운 얘기가 나오면 대부분 “나이 들면 돈 지키고 건강 챙겨서 친구와 어울려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존경받는 노인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경을 받으려면 뭔가 사회적 업적을 남겨야 할까? 아니면, 유산을 많이 남기면 존경을 받을까? 그렇지 않다.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으면, 말하자면 “꼰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어떻게 꼰대가 되는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우선 은퇴 이전에도 이미 꼰대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나이 30을 넘으면 일상에서 90% 이상의 판단과 행동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이것은 생존 본능의 당연한 매카니즘이다. 그래서 편견과 고집이 생기면서 남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승진을 하면 사회적 관계가 줄어들고, 드디어 은퇴를 하면 그나마 유지하던 관계마저 단절이 되면서 눈치 보지 않는, 브레이크 없는 일상을 살게 된다. 이렇게 습관이 켜켜이 누적되면서 점점 고집불통의 꼰대가 되는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은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전환점으로써 은퇴가 중요하다.
은퇴란 그간 사회적 관계에 매였던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은퇴하면 갑자기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진 자신을 느끼게 되는데, 대부분은 삶을 성찰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로 반응한다. 자기합리화는 지난 삶을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결국 존경받는 노인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과거를 추억하며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반면, 은퇴와 함께 자아실현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노인이 된다. 과연 자아실현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100이면 100 모두 자아실현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변명한다. 정말 나이가 들면 자아실현할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볼 때 아주 쉬운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바로 “자식 걱정을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만 하면 존경받는 노인이 될 수 있다.
부모가 자식 키우려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식 또한 부모 시키는 대로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와 인생의 목적이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다. 노래 My Way처럼. 자식이 자신의 인생을 찾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도 삶에 개입하는 것은 자연의 원리에 맞지 않다. 비록 지난날에 아쉬움이 있을 수 있으나 어쨌든 자식은 이미 혼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고, 그러니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맡기고, 부모는 부모의 삶을 챙기는 것이 정상이다. 자식 걱정을 그만두라고 하면 “부모 마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타박을 한다. 올바른 부모 마음이란 자식이 더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자식 걱정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도 자아실현을 멈추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자식 걱정을 그만둘 때, 그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가만히 되짚어볼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사실 그저 살아졌던 것이고, 학습하고 성장한 것이 없음”을 알아채게 된다.
만약 가족이나 주위로부터 감사와 존중을 받는다면, 혹시 그들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을 챙기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간 본인의 인생을 위해 해놓은 것이 많지 않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재빨리 “얘들아, 이제는 내 인생을 챙기겠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박수받고 응원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만약 감사와 존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면, 남 탓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갈등 유발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더욱 심각한 사태이므로 재빨리 “미안하다, 얘들아. 이제는 내 인생을 챙기겠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더욱 큰 박수와 응원을, 그리고 존경까지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위한 삶을 절박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노인이 된다. 그리고 죽음으로 헤어질 때 보내는 사람은 안타깝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미련이 남지 않게 된다. 이것이 노인의 웰빙이고 웰다잉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의 인생을 위한 삶”, 말하자면 “자아실현의 삶”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한다. 실패하지 않는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은 “명상”으로 “더 나은 일상”을 사는 것이다. 명상으로 지난 체험을 성찰하면 작은 학습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번 생의 목적이 느낌으로 드러난다. 이번 생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실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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