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심리학자 밀턴 로키치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궁극적 가치”와 “수단적 가치”로 나눈다.
궁극적 가치는 개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평등, 자유, 행복, 지혜, 성취감, 가정의 안정, 내면의 평온, 사회적 인정, 성숙한 사랑, 진정한 우정, 편안하고 즐거운 삶” 등이 포함되고; 수단적 가치는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성실함, 독립, 애정, 순종, 유쾌함, 정갈함, 용기, 자기 통제, 포부, 재능, 교양, 이성, 논리, 책임감, 넓은 마음, 상상” 등이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궁극적 가치 중에서 이상적인 삶의 “최종적인 상태”는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사랑”과 “행복” 중에서 고민하다가 대부분 “행복”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사랑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인데, 만약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분명 “사랑”을 최종적인 상태로 선택했을 것이다. 사랑의 실체에 대해서는 나의 첫 게시글인 “나이 50에 알게 되는 사랑의 실체(2024.10.15.)”를 참고할 수 있겠다.
아무튼 거의 모든 사람은 최종적으로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란 본래 많은 불행 속에서 잠깐씩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때의 “잠깐씩 행복”조차도 과연 진정한 행복을 말하는지는 의문이다.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요?”라고 물으면 흔히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낄 때, 또는 평안함이나 즐거움의 감정 상태 등을 언급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원하는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깐 행복한 느낌이 들어도 상황이 변하여 곧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면서 오히려 고통의 현실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하고 아는 행복을 불교는 무상(無常)한 것 또는 집착이라 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는 거짓 행복에 집착하여 실제로는 고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생존 본능(매카니즘)의 삶에서는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한 행복이란 지속적이며 영속적이어야 한다.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생존 본능에 매인 삶에서의 행복이 거짓이라면, 당연히 생존 본능을 넘어서는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해야 진정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영속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으로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2024년 3월 31일 기준 세계 인구 81억 명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까? 결국 인류의 99%는 진정한 행복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채 그저 생존 본능에 이끌려 “조금 더 즐겁게”만 집착하고 추구하다가 기어이 불행한 상태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다행히 나이 60이 되어 이제 충분히 행복한 일상을 얻고 보니, 깨달음까지는 도달하지 못해도 생존 본능에 매인 거짓 행복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방법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 학습하고 성장해야 할 과제가 설계되어 있음을 알고, 일상의 모든 체험이 소중한 학습의 기회라는 것은 알아채면, 그 순간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과 느낌은 그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무상(無常)한 것이 아니라 학습을 위한 체험임을 불현듯 인식하게 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상황이 곧 의미와 가치임을 알아채는 그것이 바로 행복 상태다.
이런 이유에서 명상 하는 일상을 통해 진정한 행복 상태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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