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우주의 실체와 본질은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된 전체로써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현상이란 “사랑의 작용으로 드러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삼라만상이 상호작용으로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이 또다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부처가 말한 궁극의 진리인 “연기”는 바로 “사랑”의 작용 원리를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연기를 알면 법을 알고, 법을 알면 연기를 안다”는 부처의 가르침은 결국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주의 원리 혹은 진리를 “체험”할 때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나 연인 간의 사랑은 모두 왜곡된 욕망의 감정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욕망에 불과한 잘못된 사랑을 명분으로 상대방을 얽어매는 악연 혹은 무명(無明)은 없어져야 하겠다.
“사랑”은 아마도 부처가 말씀하신 “무아(無我)의 깨달음”이고, 예수가 말씀하신 “성령이 깃든 삶”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랑”을 체험하고 알아챌 수 있을까?
인간에게 “무아” 혹은 “성령”을 알아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인데, 왜냐하면 생존 본능이 일으키는 생각, 감정, 느낌 등이 진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용맹정진하고 있을 수많은 종교인과 수행자의 고뇌와 번뇌를 공감하면서 이번 설날을 지나며 문득 일어난 생각(아직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연극과 배역”에 비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우주적 관점에서 “삼라만상의 상호작용으로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큰 연극”이라고 간주한다면, 나는 배역 하나를 받고 태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는 “관찰자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내가 나의 배역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이 중요할 텐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 혹은 “나의 것”을 넘어섰다는 것이며, 바로 “무아” 혹은 “성령”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족과 이웃, 반려견도 모두 각자 나름의 배역을 갖고 태어난 연극의 참여자이기 때문에 나와 동등한 소중한 동료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와 대립하는 “너”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써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원리 혹은 진리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을 체험하는 방법]
우리의 일상은 매 순간 생존 본능이 일으키는 생각, 감정, 느낌 등에 지배되기 때문에 “무아” 혹은 “성령”을 알아차리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사랑을 체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1)
첫째, 매 순간 일어나는 생각, 감정, 느낌 등은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는 생존 본능임을 “의도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정 교육, 학교 교육, 사회생활 과정에서 켜켜이 누적된 기존의 습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이런 노력을 의도적으로 하기는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나처럼 초보 수행자는 시간을 정해 명상(기도 혹은 참선 등)을 할 필요가 있다.
(2)
둘째, 우리는 각자 태어날 때 자신이 설계한 학습 목표(연극에서 맡은 역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모든 상황(연극)은 내가 스스로 설계한 학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배역(역할)임을 알 때 비로소 제대로 체험 및 학습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일상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나”와 “나의 것”을 넘어섰기 때문에 상황이나 흐름에 현혹되지 않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따라 본능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이나 느낌을 일으켜서 충동적으로 반응한다. 비유하자면 역할에 맞는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고 무의미한 애드리브를 남발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학습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악연(惡緣)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모든 생명체는 체험, 학습, 성장, 진화를 목적으로 하므로 연극(상황)과 배역(역할)은 성공할 때까지 계속된다. 말하자면 태어나면서 스스로에게 주어진 학습 목표는 어쨌든 달성해야 하는 것이고, 만약 본능에 휘둘려서 이번 생에서 설계대로 학습하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 다시 설계되어 진다.
큰 틀에서 우주적 연극은 기어이 성공하게 되는데, 그래서 삶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고, 윤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3)
셋째, 본능이 일으키는 생각, 감정, 느낌을 넘어서는 것이란 “책을 통해 지식을 쌓는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듣고 느끼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 방법이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분별심”이란 우리의 모든 논리, 개념, 관념,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많은 생각 중에서 분별심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은 잘못”임을 강조하기 위해 분별심이라는 개념을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지식으로 쌓아 이해하려는 것 또한 분별심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에필로그]
세상의 삼라만상이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큰 연극에서 각자 나름의 배역을 갖고 참여한 역할자임을 체험으로 아는 것을 “사랑”이라 말한다. 이것을 무아(無我)의 깨달음 혹은 성령이 깃든 삶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그들을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오직 목적으로 대한다. 또한 그들이 본능에 휘둘리면서 학습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대자(大慈-큰 사랑)”와 “대비(大悲-큰 슬픔)”한 불교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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