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의 길]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는 글이 있다. 당나라 때 어느 스님이 한 얘기라는데 해석하면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다. “구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만 자기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성장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출세의 길]
다른 한편으로 “隨處作主”는 많은 가정의 벽면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글자이기도 한데, 아마도 가훈(家訓)을 대신하여 자녀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주인의 정신으로 임하면 성공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고진감래(苦盡甘來)”나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보다 “隨處作主”가 조금 더 고상한 표현인 것 같기는 하다.
이런 취지의 글에 훨씬 잘 어울리는 영어 문장으로는 “Bloom where you’re planted”가 있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견디며 “심어진 곳에서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조금 소박하게 표현하면 “나무는 심어진 자리에 대해 투덜대지 않습니다” 정도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뒤의 표현이 좀 낫다.
[탐욕의 수처작주]
아무튼 일반적으로 “隨處作主”를 구도의 길이 아니라 출세의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탐욕의 처세술로 쉽게 변질된다.
한때 많은 회사에서 “주인정신”을 강조했는데, 조직 차원에서 직원에게 요구하는 “주인정신”은 개인적인 탐욕적인 “隨處作主”와 어울리면서 부작용을 일으킨다.
총괄 업무를 담당하는 팀장 시절이었다. 직원들이 신임 본부장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유난히 사업에 열정적이던 그분의 경영학 교과서적인 지휘∙통제가 전문가들인 직원들이 볼 때 답답하게 보였다. 그래서 독대 자리를 마련해서 옛이야기 하나를 해드렸다.
“옛날 어느 고을에 형편이 무척 가난한 집이 있었다. 가장인 아버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림살이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날 가족 모두를 불러 모은 뒤에 ‘앞으로 가장의 자리를 우리 집안에서 제일 현명한 막내 아들에게 맡긴다’라고 선언 했다.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막내 아들은 ‘앞으로 귀가할 때는 무엇이든 집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는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라는 지시 하나를 내렸다. 그 뒤 큰아들은 빈손으로 귀가하다가 문 앞에서 되돌아 나가 볏짚 하나 들고 들어왔고, 둘째 아들은 감자 한 개, 아버지는 달걀 한 알. 이렇게 전 가족이 조금씩 ‘집안 살림에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곧 마을 제일의 부자 집안이 되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본부장님, 이 이야기에는 가족 모두가 주인 정신을 가지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가장의 자리를 물려줘서 주인 정신을 발휘했고, 형들도 동생을 시기하지 않고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스스로 찾아서 했습니다”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내심 기대한 반응은 “그렇구나. 나도 직원들에게 권한 위임을 해줘야 하겠구나. 직원들이 각자 맡은 일에서 주인처럼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구나” 등과 같은 것이었는데, 결과는 전혀 뜻밖에도 “그렇지, 나도 지금까지 ‘막내 아들’처럼 언제나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직장 생활을 해왔지. 얘기를 듣고 보니 앞으로 더욱 그래야 하겠어”라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임을 새삼 느꼈다.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역할”마저도 객관화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주관화해버리면, 비록 수처작주(隨處作主)를 하였으나 “입처개진(立處皆眞-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에는 실패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원인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욕망(“Bloom where you’re planted”)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주인이 되려는 탐욕(“隨處作主”)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올바른 주인정신과 수처작주]
아무튼 오랫동안 나는 “입처개진(立處皆眞)”을 위한 “수처작주(隨處作主)”라면 “작주(作主)”는 마땅히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 그가 주인으로 일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고, 그럴 때 올바른 직장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적재적소(適材適所)와 다르지 않다.
[진리의 길과 수처작주]
그런데 얼마 전 “진리가 뭐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누군가 내게 진리가 뭔지 묻는다면 ‘세상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서 또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해줄 것 같애”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대답을 한 이후에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다시 생각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흐름 속에서 여러 존재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상황과 흐름에는 나름의 주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매 상황에서 주인을 찾아 역할을 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수처작주(隨處作主)’인 것 같고, 그래야만 ‘입처개진(立處皆眞-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부모가 주인이 되어야 할 상황이라면 부모가 주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아들이 주인인 상황에서는 아들이 주인이 되도록 만들고, 반려견이 주인이 되어야 할 상황에서는 마땅히 반려견이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바람이나 혹은 흩날리는 눈송이가 주인이 되어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무심한 바위가 주인이 되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수처작주의 일상]
“덕(德)”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덕행(德行)은 상황에 따라 주인이 될 자를 찾아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을 만든 흐름과 상호 작용의 실체를 알아채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위해 일상에서 성찰이나 명상이 필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어떤 상황에서든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로써 성장과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隨處作主(수처작주)의 길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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